한국경제 / 2025.07.22
김수현 기자
세계적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
체코 필하모닉 음악감독으로
오는 10월 28~29일 내한 공연
드보르자크, 차이콥스키 등 선보여
"엘리트란 잘하는 게 아니라 독보적인 것"
"베를린 필과 카라얀 일체화…위대함 느껴"
"그저 듣는 것만으로 특별한 경험 얻게 될 것"
“난 어떤 언어로도 기억되길 바라지 않는다. 음악가는 절대 죽지 않으며, 오로지 음악으로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에서 단 하나를 바랄 수 있다면, 예술가로서 주어진 잠재력을 최대한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 그뿐이다.”
러시아 태생의 미국인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73)는 최근 체코 프라하 오베츠니 둠(시민회관)에서 진행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음악을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세묜 비치코프는 파리 오케스트라, 쾰른 서독일 방송교향악단 등에 이어 2018년부터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지휘 거장이다. 1973년 라흐마니노프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고, 1986년 베를린 필하모닉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녹음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후계자를 묻는 질문에 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 일화는 유명하다.
비치코프는 오늘날 체코 필하모닉을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 반열에 올린 마에스트로로 평가받는다. 체코 필하모닉은 지난해 세계적 권위의 그라모폰 뮤직 어워즈에서 ‘올해의 오케스트라’에 선정된 데 이어 올해 BBC 뮤직 매거진 어워즈에서 오케스트라 부문을 수상했다.
그가 오는 10월 체코 필하모닉과 함께 한국을 찾는다. 10월 28일(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는 스메타나 ‘나의 조국’을 연주하고, 29일(롯데콘서트홀)에는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한재민 협연)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등을 들려준다.
▷한국 공연 프로그램으로 스메타나,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 작품을 선택했다.
“체코 출신의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는 체코 필하모닉이 본능적으로 가장 깊이 이해하고, 음악에 담긴 진정한 정신을 온전히 꺼내 보일 수 있는 작곡가 작품들이다. 차이콥스키 교향곡은 러시아 출신인 나와 체코 필하모닉이 함께한 첫 대규모 프로젝트의 핵심 레퍼토리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2010년대 세계적 클래식 음반사 데카(Decca)를 통해 차례로 발매한 ‘차이콥스키 프로젝트’ 음반 작업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우린 7년간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협주곡 등을 심도 있게 탐구했고, 그의 음악에 대한 완전한 몰입을 경험했다. 이는 우리가 드보르자크, 스메타나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차이콥스키 사운드까지 보유했음을 뜻한다. 청중은 복잡한 정보나 생각을 떠올리지 않고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체코 필은 당신의 리더십 아래 세계 정상급 악단으로 올라왔단 평가를 받는다.
“초창기부터 목표는 체코 필하모닉을 세상에 몇 없는 엘리트 악단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엘리트란 다른 악단보다 낫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사운드, 연주 스타일, 해석, 표현 등을 가지고 대체 불가능한 연주를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를 말한다. 오늘날 세상엔 많은 악단이 있지만, 소리만으로 구별되는 오케스트라는 거의 없다. 그렇기에 ‘다름’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지금 우리의 사운드는 확실히 독특하다. 전 그걸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집중해왔다.”
▷평소 단원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있다면.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라’란 말이다. 그저 귀에 닿는 소리를 듣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동료가 하고 싶은 말과 표현이 무엇인지까지 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먼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고, 그 여유를 가지고 남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야 하며, 빠르게 전체에 통합되어야 한다. 개별 캐릭터가 없는 오케스트라는 훌륭한 악단이 될 수 없지만, 개별 캐릭터가 서로 어우러지지 않는 오케스트라 또한 뛰어난 악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카라얀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는 후계자에 대한 질문에 당신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다.
“카라얀은 어릴 적 우상 중 한 명이었다. 실제로 만난 그는 타고난 교육자이기도 했다. 평소엔 말을 아꼈지만, 음악적인 질문을 하면 악보에 담긴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지휘에 대해 알려줬다. 그는 많은 영향을 줬지만, 특히 베를린 필과 카라얀 사이의 일체화는 지금까지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카라얀은 자리에 없지만, 요즘에도 베를린 필을 지휘할 때면 그의 유산과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소수의 지휘자만 누릴 수 있는 영광과도 같다.”
▷야쿠프 흐루샤가 당신의 뒤를 이어 2028년 가을부터 체코 필하모닉을 이끌 예정이다.
“흐루샤는 나이는 젊지만, 탄탄한 경력을 쌓아온 지휘자다. 체코 필하모닉과 20년 이상 관계를 맺어왔고, 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도 맡아왔다. 무언가를 더 평가할 필요도 없이 그는 리더로서 필요한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는 지휘로 자신이 어떤 음악가인지 생생히 보여줄 것이다.”
▷당신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음악가다. 예술가가 정치·사회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나.
“모든 건 개인의 선택이다. 다만 내가 믿는 건 예술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분리된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무관할 수 없다. 그렇기에 또다시 참혹한 문제가 발생하고, 그에 대한 뚜렷한 의견이 생기며, 적절한 시기라고 느낀다면 주저 없이 무언가를 표현할 것이다.”
▷음악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가.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순 없다. 그러나 예술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간은 음악을 통해 순간적으로 고통을 잊어버리고 고귀한 힘을 얻어왔다. 이는 예술의 강력한 힘이다. 유일한 소원은 우리의 연주가 끝나고 집을 향하는 사람들의 일상에 음악의 선한 영향력이 조금이나마 더 오래 남아 있고, 기억 속에 한동안 머무르는 것이다. 제게 그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