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서울 지에스아트센터에서 펼쳐진 ‘베자르 발레 로잔 위드 김기민’ 공연에서 김기민이 원형 무대 위에서 군무를 이끌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지난 23일 서울 지에스아트센터에서 펼쳐진 ‘베자르 발레 로잔 위드 김기민’ 공연에서 김기민이 원형 무대 위에서 군무를 이끌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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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흐른 뒤 막이 오르자 붉은색 원형 테이블 위에 홀로 선 김기민. 이내 익숙한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리듬에 몸을 맡긴다. 팔을 들어 올리고 손목, 어깨, 가슴, 허리로 미세하게 움직이던 몸짓은 에너지를 축적하며 점점 빨라진다. 대화하고, 갈구하듯 오랫동안 이어진 춤에도 테이블 아래 남성 무용수들은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김기민의 몸짓은 더욱 격렬해지고, 무언가 강렬히 호소하는 듯 무대의 열기를 한층 끌어올리자 이내 2명의 무용수가 탐색하듯 다가온다. 김기민과 ‘발레 배틀’을 벌이듯 또는 대화하듯, 마치 개미가 페로몬을 주고받으며 서로 갈 길을 알려주듯 춤을 주고받는다. 이내 무용수는 4명, 8명, 10명으로 불어나고, 어느새 36명의 모든 무용수가 군무를 시작한다. 테이블 위 김기민과 아래 무용수는 하나가 된다. 김기민은 혼신을 다해 모든 관절과 근육의 힘을 응축하며 때론 물 흐르듯, 때론 화려하고 격하게 교향악단을 지휘하듯 무용수의 에너지를 극강까지 끌어올리며 클라이맥스로 내달리더니 순간 깊은 정적이 흐른다. 15분쯤 흘렀을까? 김기민의 ‘볼레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지난 23일 서울 지에스아트센터에서 펼쳐진 ‘베자르 발레 로잔 위드 김기민’ 공연에서 김기민이 원형 무대 위에서 군무를 이끌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지난 23일 서울 지에스아트센터에서 펼쳐진 ‘베자르 발레 로잔 위드 김기민’ 공연에서 김기민이 원형 무대 위에서 군무를 이끌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땀이 뒤범벅된 김기민과 무용수들이 관객에게 거듭 감사를 표한다. 다시 막이 내려오지만 관객은 쉽사리 그를 돌려보내지 않을 기세다. 무대 앞으로 그를 계속 끌어낸다. “안 돼, 안 돼~.” “여기서 끝낼 수 없어~.” 3분 이상 이어진 커튼콜에 김기민과 무용수가 지친 듯한 모습을 보일 즈음 객석에선 다른 목소리가 터진다. “이제 집에 가게 해줘야지.” 관객이 객석을 떠날 때 긴 장막이 내려진 무대 안쪽에선 김기민과 무용수들이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듯 큰 박수와 환호를 주고받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난 23일 저녁 서울 역삼동 지에스(GS)아트센터, ‘베자르 발레 로잔 위드(with) 김기민’ 공연의 마지막 프로그램 ‘볼레로’는 15분 남짓 ‘짧지만 격렬하고 인상적으로’ 끝이 났다. “역시 김기민이야. 토요일에 또 보러 올까?” “저 테이블 위에서 균형 잡고 쉼 없이 춤추는 게 얼마나 어렵겠어. 정말 잘한다.” 관객들은 지하철 역사로 발을 옮기며 감탄을 쏟아냈다. 일부는 조심스레 “군무가 딱딱 맞는 것 같지는 않은데…. 좀 아쉬워”라고 속삭였다. 게스트 무용수로 평생 꿈꿔온 모리스 베자르의 대표 레퍼토리 ‘볼레로’를 마침내 춘 김기민은 스스로 어떤 평가를 할지 궁금했다.

지난 23일 서울 지에스아트센터에서 펼쳐진 ‘베자르 발레 로잔’의 새 창작 발레 ‘햄릿’ 공연 장면.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지난 23일 서울 지에스아트센터에서 펼쳐진 ‘베자르 발레 로잔’의 새 창작 발레 ‘햄릿’ 공연 장면.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이날 공연에선 ‘볼레로’에 앞서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토대로 안무가 발렌티나 투르쿠가 창작한 발레 ‘햄릿’과 모리스 베자르가 생전에 재해석한 ‘불새’도 공연했다. 2024년 초연한 ‘햄릿’은 시작부터 익숙한 전통 발레의 문법을 뒤집었다. 무대에 놓인 의자에 햄릿에게 복수를 당부하는 선왕의 망령을 상징하는 흰색 수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인물을 중심으로 검은 수트 차림의 남성들과 검은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이 자리 잡고 앉았다. 햄릿과 연인 오필리아, 아버지를 죽인 왕비 거트루드, 그리고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들로 이들이 의자에서 내쳐지고, 무대 경계까지 밀려나고, 치열하게 싸우고, 아름답고 격하게 사랑하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눈에 보이는 왕관도 없다. 대신 선왕의 망령이 햄릿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동작 등을 반복할 뿐이다. 총이 등장하고, 추방을 암시하는 캐리어 등 현대인에게 익숙한 소품도 적절히 활용한다. 한 편의 연극처럼 박진감 넘치는 햄릿은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진실과 광기, 사랑과 배신 사이에서 흔들리며 결국 죽음에 이르는 인물들의 내면을 무대 공간과 소품을 활용하며 아름답고 유려한 발레로 구현했다.

지난 23일 서울 지에스아트센터에서 펼쳐진 ‘베자르 발레 로잔’의 발레 ‘불새’ 공연 장면.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지난 23일 서울 지에스아트센터에서 펼쳐진 ‘베자르 발레 로잔’의 발레 ‘불새’ 공연 장면.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검푸른 중국 인민복을 입은 파르티잔(레지스탕스) 남녀 무용수들과 지도자인 붉은 레오타드를 입은 남성이 ‘불새’로 등장하는 작품 ‘불새’는 발레의 아름다움과 색채 미학이 잘 드러났다. 불새를 중심으로 남녀 무용수가 펼치는 원형 군무는 마치 강렬한 빨강과 파랑, 초록색으로 단순하고 선명하게 원초적 생명성을 표현한 화가 마티스의 대표작 ‘춤’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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